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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세계 부호 워런 버핏 (Warren Edward Buffett) [1]

11살때 주식매입, 거의 본전에 팔았는데 곧 5배로 폭등
“주식투자는 참는 것” 평생교훈 삼아
6살때 신문사절 독자에 “그럼 경쟁신문 보세요”
대학원시절 그레이엄교수 만나 인생 대전기
‘내재가치’ 85% + ‘성장투자’ 15% = 버핏 성공비결

 
1930년 8월 30일 주식브로커와 상원의원을 지낸 부친 (Howard)과 모친 (Leila) 사이의 3 자녀중 둘째 외아들로 태어난 워런 버핏은 어렸을 때부터 사업에 눈이 밝았다. 6살 되던 해 조부의 식료품 가게에서 코카콜라 여섯병 팩을 25센트에 받아다 친구들에게 병당 5센트에 팔아 5센트의 이익을 냈고, 골프장에서 골프공을 주워다 팔고, 새벽 5시부터 신문배달을 했다. 신문배달을 거절한 구독자에게는 경쟁사 신문까지 배달해 당시 성인월급과 맞먹는 175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배달효율을 올리기 위해 다세대 아파트 입주자들을 겨냥했다.
 
11살 때 그는 누이 도리스와 함께 주당 38달러에 ‘시티스’회사 주식 3주를 샀다. 주식이 27달러로 떨어지자 놀랐지만 40달러로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팔았다. 그러나 곧이어 200달러로 급등하는 것을 목격한 워런은 주식투자에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평생 교훈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13살에 개인 세금보고를 혼자 해냈다. 신문배달에 소모되는 자전거를 수입에서 공제했다. 14살 때는 신문배달로 모은 돈 1,200달러로 농지 40 에이커를 구입, 농부에게 임대했다. 15살 되던 해에는 기계를 잘 고치는 친구와 윌슨동전작동기계회사를 세우고 중고 핀볼머신을 구입해 이발소에다 설치하고 이발소 주인과 수입을 반으로 나누었다. 나이를 속일 수 없어 이발소 주인들과 사업계약을 할 때에는 윌슨사 사장의 심부름꾼으로 가장했다. 곧 기계 7대를 3군데 차려 사업은 번창했으나 1947년 대학진학을 위해 사업체를 1,200 달러에 처분했다.
 
17살에 고교를 졸업한 워런은 임대사업, 신문배달 등으로 재산이 5천 달러 (현재가치로 약 20만 달러)나 되었지만 부친의 권유로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와튼경영대학에 입학했다. 1948년 상원의원 4선의 부친이 낙선, 고향 오마하로 돌아오게 되었고 워런은 네브라스카 링컨대학교로 전학해 3년만에 학사과정을 마쳤다. 20살에 대학을 졸업한 워런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거절당했다. 차선책으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입학,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 교수와 더드(David Dodd, 1895~1988) 교수에게서 내재가치 중심의 금융 및 재무분석을 배웠다. 두 교수는 내재가치 중심투자(Value Investments)의 국제적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레이엄의 재무분석 강의는 워런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21살에 그레이엄교수 강의 역사상 유일하게 최고학점 (A+)을 받고 졸업한 워런은 월가에서 주식브로커로 일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레이엄 교수와 부친의 만류로 포기하고 그레이엄 교수의 무보수 파트너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오마하로 돌아와 네브라스카 야간대학에서 성인반 ‘투자기본’을 가르치며 부친과 함께 주식브로커로 일했다. 워런은 수줍은 성격으로 군중연설 공포증을 심하게 갖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일 카네기 연설코스(Dale Carnegie Course)를 수료했다.
 
1952년 22살의 버핏은 그동안 알게 된 수잔(Susan Thompson)과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해 첫딸 수잔 앨리스를 낳았다. 그들은 월세 65달러의 값싼 아파트에 가정을 꾸몄고 돈을 모으기 위해 장농서랍을 아기침대로 사용했다. 1954년 24살 때 그레이엄교수 요청으로 연봉 1만2천달러를 받고 뉴욕의 그레암투자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첫아들 하워드를 낳았다.
 
워런은 숫자에만 치중하는 그레이엄교수의 재무분석 방법에 경영진의 능력과 회사의 잠재성장 및 합병 가능성을 측정하는 질적인 재무분석법을 가미했다. 성장중심의 투자가(Growth Investor)로 잘 알려진 피셔 (Phillip Arthur Fisher)는 성장 가능성으로 주식가치를 결정했다. 워런은 자신이 내리는 투자결정의 85%는 그레이엄 교수의 내재가치 중심투자, 15%는 피셔의 성장중심 투자의 합성이라고 말한다.
 
1956년 그레이엄교수가 은퇴, 투자회사를 떠나자 워런은 그동안 모은 돈 14만 달러를 갖고 고향 오마하로 돌아와 자산 10만 달러 규모의 버핏투자회사를 세웠다. 워런 자신은 100 달러를 투자했다. 그는 월급을 받는 대신 연 이익금 4% 이상되는 금액의 25%를 배당받았다.
 
다음해 27살의 워런은 3개의 투자사를 경영했고 현재까지도 거주하는 가정집을 3만 1,500 달러에 구입했다. 그 중 침실 하나를 사무실로 사용했다. 1958년 5개의 투자회사를 관리하게 되었고 둘째 아들 피터를 낳았다. 1959년에는 평생 동업자인 챨리 멍거(Charlie Munger)를 소개받았다.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워런의 투자회사는 25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다우지수는 74.3% 올랐다. 1962년 32살의 워런은 순자산 100만 달러의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90명의 유한동업자들(Limited Partners)로 구성된 투자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직물공장 주식을 주당 7달러 60센트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1965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주당 14달러 86센트에 대량구입, 이사회를 통제하게 되었고 켄 체이스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다음호 계속)
 
성장중심 투자 (Growth Investments)란?
 
평균 이상의 성장기미를 보이는 회사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P/E (Price/Earning) 비율과 P/B (Price/Book Value) 비율과 무관할 수도 있다. 즉, 주가에 대한 이익이나 자산의 비율이 적더라도 잠재성장이 큰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방법이다.
 
워런은 그레이엄 교수의 내재가치 중심의 투자에 성장중심의 투자를 가미해 광범위한 내재가치 중심의 투자를 탄생시켰다.
 
Yoo글 : 유동환(DY & PARTNE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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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March 5, 2014

Filled Under: Column,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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