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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남매의 시골소년, 다민족의 리더가 되다. 조성준 토론토 시의원

발로 뛰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령
한인사회와 주류사회를 잇는 가교가 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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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사회의 리더 조성준 토론토 시의원(Ward 42, 스카보로 루즈 리버)은 한인 정치인 1호로 교민사회에 많은 공헌을 한 선구자이자 많은 후배들의 롤 모델이다. 월드인 캐나다는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조성준 의원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줄 깊이 있는 조명의 시간을 가졌다.
 
첫인상
 
기자들이 본 조성준 의원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은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였다. 토론토 시의원의 차라고 보기에는 너무 낡은 차였다. 13년이 넘은 혼다 승용차는 31만 킬로를 달렸다고 한다. 20년이 넘는 관록의 토론토 시의원으로서 조금은 고급 승용차를 타도 될 것 같은데, 다음에 차를 바꾼다면 현대 소형차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를 통해 격의 없이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정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또하나 인상적인 것은 낡은 차 안에 가득한 잡동사니들이었다. 궁금해서 가만히 들여다 보았더니 토론토 시정을 돌보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든 각종 자료와 시정에 관해 읽던 관련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에게 나누어 줄 각종 안내 자료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 차를 몰고 호텔에 가면 아마 심부름을 온 차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어째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아직 잘 굴러가고 튼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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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준 의원의 하루
 
조성준 의원이 토론토 시의회에서 맡고 있는 일은 참 많다. TTC 위원, 경제개발위원회 위원, 토론토 동물원 운영 이사회 이사, 보건이사회 이사, 토론토 지역 보전공사 위원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토론토 시청 건물 2층에 자리잡은 그의 시의원 사무실은 토론토 시장 집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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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각종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늘 안건 문서들을 읽느라고 정신이 없다. 안건을 놓고 심의하고 처리하는 토론토 시의회의 과정은 매우 진지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조성준 의원은 하루의 대부분을 시의 각종 위원회와 전체 의회에서 심의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그리고 보좌관들과 회의를 하며 정책 대안을 마련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저녁이면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느라 개인적인 시간을 빼기 힘들다고 한다. 언제 운동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밤 10시 넘어서도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체력 단련을 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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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그는 어린 시절 국민학교 5, 6학년 때 결핵을 앓았다. 그래서 그는 약자가 어떻게 사는지 체험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분은 어머님이다. 얼마 전100세에 세상을 떠난 충청도 여인인 어머니는 국민학교도 못 갔지만 지혜가 많고 인간을 사랑하고 용감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콜레라로 돌아가신 후 인천에서 여관을 하며 8 남매를 먹여 살리셨다.
 
어머니는 새벽 6, 7시에 농촌 아낙네들이 먼 길을 걸어와 채소를 팔러 오면 국에 밥을 말아 무료로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팔러 온 푸성귀를 다 사 주셨다. 어린 조성준은 밥을 공짜로 베풀고 물건을 사주시는 어머니의 자상함에 큰 감동을 받고 자랐다. 돈 안내고 도망가는 하숙생들이 많았던 그 시절. 어머니는 일찍이 homeless people들을 보살피셨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아낙네들을 돌봐주신 어머니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지 않고 누구든지 똑같이 사랑해 주셨다.
 
한국전쟁의 난리를 피해 조성준은 큰 화물선을 타고 부산까지 피난갔으나 그의 홀어머니는 끝까지 혼자서 집을 지키셨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구두 닦고 신문 배달도 하면서 고난의 현장을 뚫고 나왔다.
 
누님의 꿀밤과 영어 교육
 
그에게 누님은 아주 특별한 롤모델이었다. 그가 인천중학교 1학년 때 이화여대에 다니던 누님이 그의 영어시험 준비를 위해 모의로 시험을 내주었다. 공부를 안한 그는 빵점을 맞았다. 그는 그날 누님에게 꼴밤을 쥐어 맞으며 엄한 꾸중을 들었다. 잔뜩 혼이 난 그는 밤새 영어 공부를 했다.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린 중학생 조성준은 그 다음주 시행된 학교 영어단어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부터 영어가 좋아졌다. 그의 인생에 있어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어와의 관계는 이미 그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롤모델이자 인생의 중요한 때마다 영향을 준 누님은 나중에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30년 넘게 재직 후 은퇴 하셨다.
 
결핵 때문에 한 학년을 쉰 그는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와 운동으로 고교 때는 운동선수급의 좋은 몸을 가졌다. 하지만 공부에 전력질주하지 못한 탓에 원하던 서울대에서 낙방하였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루라도 빨리 집안의 기둥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1년 후 외국어대 영어과에 들어갔다.
 
성공의 목표- 세상을 밝히고 홀어머니에게 효도
 
그는 대학 시절 내내 5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다가 밤하늘에 떠 있는 새벽별 금성을 바라볼 때면 ‘나도 성공해서 별처럼 세상을 밝히고 보살피는 리더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평생 홀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이 어느새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 코피가 터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지만 그의 향학열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 2 명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직장이었다. 그만큼 실력이 없으면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운 직장이었다.
 
그는 해군에 다니는 남동생의 캐나다 이민 신청의 통역 도우미를 했다. 홍콩에서 날아 온 이민 심사관은 통역을 하는 그에게 캐나다 이민을 권유했다. 캐나다 이민이 허락된 사람은 정작 남동생이 아니라 조성준이었다.
 
1967년 3월 유학 온 기분으로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조성준은 5~10년 내에 백만장자가 되어 돌아가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당시 캐나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이 심했다. 캐나다 학력과 경력이 없는 그가 가질 수 있는 변변한 직업은 어디에도 없었다.
 
접시닦이로 시작한 캐나다 생활
 
밴쿠버 공항에 들어올 때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100 달러 밖에 없었다. 뭐라도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할 조성준에게 기다리는 좋은 직업은 없었다. 캐나다에서 그가 첫번 째 가진 직업은 접시닦이였다. 접시닦이 2주 하고 나서 40불을 받았을 때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죽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은행에 예금하러 갔을 때 텔러가 직업을 물어보았다. 그는 “My job is dishwasher!”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석면광산에 들어갔다. 낮에는 석면광산 노동자, 5시에 퇴근하자마자 햄버거 하나 사먹고 술집에 가서 웨이터, 밤 10시 반이나 11시부터는 청소부로 일했다. 쓰리잡을 하다보니 돈이 금방 모였다.
 
그는 수요일마다 열린 사교클럽에서 영어도 배웠다. 학비에 필요한 돈을 많이 벌어서 B.C 주립대학 MBA 에 들어가서 공부할 요량이었으나 몸이 너무 피곤했다. 아무리 건장한 청년이라 하더라도 그런 중노동을 세 가지나 하는데 버틸 재간은 없었다. 경영학 석사과정이 그에게 적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망설임 끝에 그는 갈 때 가더라도 토론토에 가서 도전을 해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 밤 낮에 걸쳐서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도 직업 구하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토론토 제너럴 병원에 청소부로 취직했다. 캐나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헤매고 다닌 셈이다. ‘여기서 성공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적성에 제일 맞는 것은 사회사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공부 또 공부
 
IMG_1399-2밤낮으로 공부하는 그는 토론토 대학교 대학원에 다닐 때 학교의 소개로 아동복지소의 사회사업가로 취직했다. 사회사업 석사학위를 마친 후 상담심리학 석박사를 받았다. 교민들이 찾아와 정계에 입문해달라는 취지의 설득을 했다. 박종철 군 물고문 치사사건의 기사를 보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벤쿠버에서 일할 때부터 그는 주류사회를 잘 이해하고 캐나다에 대해 더 알기 위해, 광산에 들어갈 때 신약성서를 갖고 들어갔다. 예배 끝나고 나올 때 사람 보아가며 악수를 하는 사람들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교회에서조차 허름한 옷차림에 돈이 없어보이면 차별대우를 받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왔다.
 
이를 악물고 공부에 또 공부를 했다. 캐나다 주류사회에서 당당하게 한인으로서 커뮤니티의 대변자로 우뚝 서는 길은 형설지공의 노력이 들어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당시 한인들의 위상은 그야말로 밑바닥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시당하고 차별대우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당선되면 손 한 번 잡아주세요”
 
정치는 잘못된 걸 바로잡는 발과 같다. 일본의 지문날인 제도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제시 잭슨 목사와 함께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며 일본의 지문 날인제도 철폐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주류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신민당 연방의원 후보로 나서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자유당 텃밭이어서 안될 줄 알면서도 그가 1년 동안 발로 뛰며 선거운동을 했을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사연은 어느 한인 노인분이 “당선되면 꼭 내가 일하는 곳에 찾아와서 손 한 번 잡아주세요”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던 한마디였다. 우리 한인 중에도 어엿한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외국인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예상했듯이 그는 1988년 연방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하지만 그는 후세들에게 도전하는 용기를 주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이 인정을 받았는지 3년 후 그는 온주 신민당의 광역의회 의원으로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것도 백인들이 유색인종인 조성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유래가 없었던 일이다.
 
최초의 유색인종 광역시의원
 
광역의회 의원은 지역구에서 뽑힌 당선자 28명과 자동 의원이 되는 시장 6명을 포함해 총 3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광역시의원에 당선된 최초의 유색인종’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도전과 불굴의 정신이 일구어낸 인간 성공 드라마는 많은 한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연아 마틴 상원의원이 2008년 연방의원에 도전했을 때 출마동기가 조성준 의원이었다고 할 정도로 조 의원이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소수민족에 깊이 뿌리를 내리다
 
그가 시의원에 당선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은 ‘나무 심기 운동’이었다. 지금까지 22년간 그가 식목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심은 나무가 3만 그루 이상 된다. 엄청나게 많은 나무를 캐나다 땅에 심은 셈이다. 그 밖에도 그가 사회를 위해 행동한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의회에 로비를 해서 한인회관 건물의 재산세를 면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타민족과 어울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타밀 사람, 필리핀 사람, 중국 사람, 이슬람 사람, 힌두교 사람 등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가족처럼 지내는 그의 친화력과 따뜻한 마음은 이미 소수민족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받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시의원 당선 7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의문점이 풀린다.
 
차세대 지도자를 키운다
 
GYL(Global Youth Leader)이라는 단체를 이끌며 차세대 지도자를 키우는 그는, 자라나는 젊은 청년들에게 올바른 미래에 대한 비전과 큰 가치관을 심어주어서 세계적인 리더로 키우는 원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차세대 지도자들은 이미 파키스탄에 개당 $800하는 우물을 파는데 들어가는 펌프 비용을 여러 개 모금해 감당했다.
 
22년간 나무를 심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조성준 시의원이 사람들을 심고 있다. GTA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그의 노력은, 주류사회와 담쌓고 사는 많은 한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나는 국제 거지”
 
조성준 시의원은 2012년에 토론토 시의회 회의실에서 ‘탈북민 합동결혼식’이라는 색다른 이벤트를 마련했다. 15쌍의 탈북민에게 결혼식을 제공하고 주류사회에 탈북민의 실상을 알리려는 그의 깊은 관심과 열정이 여지없이 이 행사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탈북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보다는 생명을 걸고 수천 마일을 도망쳐 캐나다에 온 탈북민들을 감싸 안으려고 애를 쓴다.
 
스스로를 “국제거지”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잘 사는 사람에게 구걸해서 못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선행의 본질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힘든 사람을 도와주자고 외치면 한인 사회는 물론 다른 소수민족도 발벗고 나서서 참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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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가족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한다. 특히 어릴 적 그의 인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어머니의 추억은 지금도 아련하기만 하다. 그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사랑의 근거를 발견했고 사랑의 힘을 배웠고, 이것이 그의 일생을 사는데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곁에서 묵묵히 응원과 지원을 한 부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선거 때마다 그의 캠프의 선거사무장을 10번이나 했을 정도로 부인은 가장 큰 내조자 중의 하나였다.
 
“오늘이 있기까지 내 인생에 전환점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와 아내죠. 특히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가 없지요.”
 
그의 세 아들은 장성하여 위로 두 아들은 미국에서 각각 정신과 의사와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몬트리올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첫째 며느리는 한국인, 둘째는 중국계 미국인, 세째는 프랑스 출신의 백인 캐네디언으로 조성준 시의원 가족은 그 자체가 다민족 사회다. 세계 모든 민족이 어우러진 복합문화주의 캐나다에서 그가 추구하는 포용성과 다양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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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의 대부가 되어
 
조의원을 가까이서 대하면 지역 현장을 발로 뛰는 정치인의 전형을 엿볼 수 있었다. 인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조 의원을 지역 주민들은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근엄하고 권위적인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조 의원은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그가 주체하는 행사에는 타밀계와 필리핀계 어린이 등 타민족으로 구성된 공연팀이 늘 함께 참여한다.
 
지역 주민의 상당 부분을 타밀계와 필리핀계 민족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구에서 조의원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뿌리깊은 나무와 같았다. 조의원을 다정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대하는 지역주민들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동안 주민과 함께 하는 현장 정치에 충실한 조의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소수민족의 외로움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가 지금은 소수민족의 대부로 그들을 보듬고 있다. 그는 청년 유학생 시절 힘겨운 고학 생활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이다. 바에서, 탄광의 갱도에서, 그리고 병원 청소부로 캐나다 사회의 팍팍한 삶의 현장을 몸소 체험한 그가 타민족에게 다가가 표를 얻고 지역 대표로 토론토 시의회에서 활약하고 있다. 인간승리의 휴먼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를 보며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새로운 도전
 
조의원과 인터뷰하면서 다민족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정치인의 모습을 보았다. 복합문화사회 캐나다에서 이민자의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주류사회 정치인으로 입지를 굳건히 세운 조성준 의원.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남모를 눈물과 땀이 있었으리라. 철저히 준비하는 자에게 밝은 미래는 손짓을 할 것이라는 진리를 그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는 다가올 주총선에서 주의원에 도전한다. 팔순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그가 온주 주의원에 당선되어 더 넓은 곳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펼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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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현 기자, danny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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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March 13, 2014

Filled Under: Global People, GTA, Headline, News, Old Headline

3 Responses to 8남매의 시골소년, 다민족의 리더가 되다. 조성준 토론토 시의원

  1. 정동훈 says:

    조성준 의원님은 저에게 정말 은인과 같은 분이십니다.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없고 믿을 것 없는 저를 대가없이도 마음을 다해 도와주셨습니다. 진정한 배려를 받아본 사람은 결코 그 것을 잊지 않습니다. 잊지 않고 꼭 사회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곘습니다.

  2. 감동 받은 이 says:

    대단하시네요. 40대 이민자로서 한계에 부딛히는 좌절과 무력함을 매일 경험하는데 기사를 읽고 힘이 납니다. 50대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각오로 힘없는 이민자가 아니라 자신있는 캐네디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서윤기 says:

    기사를 보면서 삶의 역경을 극복해왔던 노력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따듯한 마음과 결단,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이 보여집니다. 절로 고개숙여지고 꼭 뵙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서울에서도 응원하겠습니다. 인종과 민족을 떠나 캐나다의 젊은이들이 조 의원님과 함께 성장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