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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김종필 별세, 선 굵고 다사다난했던 ‘영원한 2인자’

향년 92세로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우리 현대 정치사를 관통하는 ‘풍운아’로 불린다.
 
고(故)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시대’를 이끈 지도자였으나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 못한 영원한 2인자였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1952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소수정예의 핵심 부서인 육군 정보국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여기서 정보국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박 전 대통령의 큰형인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 ‘박씨 일가’와 친족이 됐다. 김 전 총리가 정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1961년 5·16 군사정변(쿠데타)이다.
 
김 전 총리는 나중에 정변을 자신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술회했다. 그만큼 정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5·16 후에는 박 전 대통령에게 정보기관 설립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중앙정보부. 김 전 총리는 초대 수장(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오히라 메모’로 유명한 한일 청구권 협상을 중정부장으로서 막후에서 진행했다. 그러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정치자금 사건이 드러나며 중정부장에서 물러났다.
 
김 전 총리는 중정부장 퇴임 후 한 때 외유 생활을 했다. 군사정권 권력 암투 과정에서 다른 세력에게 견제를 당해 외유를 떠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한 발언이 유명하다.
 
김 전 총리는 그러다 1963년 제6대 국회 공화당 의원으로 등원한다. 같은해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선하고 11월 6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의원 110명을 배출하는 대승을 거두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김 전 총리는 6대 국회에서 공화당 의장까지 지내고 1967년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68년 다시 반대세력에게 밀려 정계를 은퇴하고 다시 해외로 나갔다.
 
다시 귀국해 1970년 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71년~73년 공화당 부총재를 거쳐 71년 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71년부터 75년까지는 박 전 대통령에게 국무총리로 발탁됐고, 그 사이 9대 국회의원(73년)을 겸했다. 실세 총리였던 그는 75년 국무총리를 ‘건강상’ 이유로 사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79년 10·26 사건 후 김 전 총리는 공화당 총재가 됐지만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로부터 80년 정치활동을 금지당한다.
 
당시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강제로 재산을 환수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또 다시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미국에서 신군부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김 전 총리는 생전에 이를 부인했다.
 
김 전 총리는 귀국 후 기존 민주공화당을 ‘신민주공화당’으로 재건했고, 87년 공화당 총재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88년 치러진 총선에서 김 전 총리의 신민주공화당은 원내 4당(35석)이 됐다. 공화당은 이듬해인 89년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자유당’을 합친다. 그 유명한 3당 합당이다.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다. YS 정권 초기 김 전 총리는 당 대표까지 지냈으나 민주계 측과의 갈등과 의원내각제 개헌 등을 둘러싼 갈등 끝에 95년 탈당했다.
 
그리고 만든 당이 충청권 중심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다. 김 전 총리가 총재로서 이끈 자민련은 96년 15대 총선에서 50석(지역구 41, 전국구 9)을 얻으며 원내 3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김 전 총리는 15대 총선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연합했다. 이 ‘DJP연합’ 성공으로 김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 등 역시 갈등 끝에 2000년 16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과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연합하지 않았다.
 
결국 충청권 기반인 자민련은 충청 이외 지역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의석을 빼앗기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그와 손을 잡은 대선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킹메이커’ 김 전 총리는 2002년 16대 대선 때는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 후보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9선 국회의원과 2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정국 여파로 2004년 정계를 은퇴했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은 노 전 대통령 탄핵을 가결시켰고 그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대패했다. 김 전 총리의 자민련은 지역 기반인 충남에서만 4명이 당선되고 비례대표는 단 한석도 얻지 못했다.
 
비례대표 후보로 10선을 노리던 김 전 총리는 그러면서 40년 넘는 제도권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계 은퇴 후 김 전 총리는 별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원로로서 막후에서 다소의 영향력을 미쳤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대해 “최태민 목사와의 사생아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큰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다.
 
김 전 총리는 2015년 부인인 박영옥 여사를 먼저 떠나보냈다. 생전 잉꼬부부로 자자했던 김 전 총리는 당시 “국립묘지가 아닌 마누라와 같은 자리에 눕겠다”고 말했다.
 
당시 박 여사 빈소에 발걸음한 수많은 후배 정치인들에게 김 전 총리는 “정치는 허업”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특히 2015년부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주자로 부상하자 반 총장과 긴밀하게 접촉, 대선 국면에서 또 한번의 ‘킹메이커’를 자임하면서 노(老)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역할을 자청했었다.
 
김 전 총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뇌졸중을 앓고 있지만 휠체어를 타고 외부 활동을 할 만큼 비교적 건강했던 김 전 총리는 23일 끝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 스타일은 선이 굵고 다사다난한 ‘풍운아’였지만 예인(藝人)이라고 불릴 말큼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고 풍류를 좋아하는 어른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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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June 23, 2018

Filled Under: Headlin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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