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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 때문에 (탈북수기) 1

나는 북한에서 살 때 비교적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어리숙하다는 뜻이다.
북한정권은 주민들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고지식은 미덕이라는 교육을 많이 했다.

“장군님(김정일)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아야”

이 말을 나는 당 회의 때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북한의 영화나 선전물에도 “고지식은 당원의 미덕”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는 순수하고 고지식한 당원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충성하는 것이 당원의 본분,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갈수 있는 곳이 북한사회였다.
나 역시 무난하게 살려면 정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나는 가족을 잃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시키면 시키는대로 사는데 습관되어 있었다.
집을 떠나 산판의 벌목장과 발전소 건설장, 국가에서 진행하는 대상건설장을 비롯한 열악하고 힘겨운 곳에 수없이 동원되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기 싫어 구실을 대고 발뺌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나는 바보였다.
나는 아내가 죽었을때에도 집에 없었다. 평양-남포고속도 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있었다.
아내는 굶어죽었다. 혼자 세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하다가…

아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의 시신앞에서 울지도 못했다.
나는 그때 북한정권이 주민들에게 늘쌍 설교하는 충성과 고지식함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억울하게 저세상으로 간 아내에게 너무 죄스러웠다.

아내가 죽은 후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아내는 열두살과 아홉살, 일곱살이 된 세 자식들을 남겨놓고 죽었다.
일곱살인 막내는 딸애였다.

그때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던 1996년이었다.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전에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세끼를 굶기지 않고 먹이기 위해 못해본 일, 못해본 짓이 없었다.

봄에는 산골짜기의 부대기 농사를 했고 여름에는 강가에서 사금채취를 했다.
겨울에는 장사를 다녔다.
가을에는 농장 밭에 들어가 도적질도 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않고 일했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한 번도 배불리 밥을 먹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최악의 굶주림을 견디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굶어죽기가 정승하기보다 힘들다”는 속담의 뜻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굶주림을 참고견디라는 말이 야만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못해 날이 갈수록 허약해 질때면 식욕은 참기 어렵게 왕성해진다.
특히 아이들이 그 강렬해진 식욕을 억제하며 굶주린다는 것은 참기어려운 고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업다 .
정승도 3일을 굶으면 도적질을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 같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가면 항상 저녁 늦게야 돌아오군 했다.
옥수수나 기타 먹거리를 구하러 부근 농촌에 장사를 갈때면 이틀씩, 사흘씩 집에 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어린 세 자식들은 어른 없는 집에서 무서운 밤을 보냈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갈때면 항상 어린 세 자식들의 점심밥을 따로따로 공기에 담아 두군 했다.
멀리 갈때에는 저녁밥까지 공기에 담아 찬장안에 놔두군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접심이나 저녁때를 기다려 자기 밥 그릇을 꺼내먹군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은 나중에 밥시간을 맞춰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있으면 보는 족족 먹어치우군 했다.
점십밥을 그릇에 담아 찬장안에 넣어두면 아버지가 일하러 가기 바쁘게 모두 꺼내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접심을 굶었다.
먹을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형이 동생밥을 훔쳐먹기도 하고 동생이 형의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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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타이르다가 나중에는 속이 타서 화를 내고 심지어 어린 자식들을 두둘겨 패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 절박한 것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굶겨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애들이 하루 한끼만 배불리 먹고 다음 두끼는 굶는 비정상적인 식습관을 지속하다가, 나중에는 허약해지고 또 그 허약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간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비록 풀에다가 옥수수가루를 조금 넣고 끓인 영양가 없는 음식이지만 그것이라도 자식들에게 정상적으로 먹이려고 애썼다.

나는 어린 자식들이 아침에 점심저녁밥까지 먹어치우는 비정상적인 음식섭취와, 굶주림으로 왕성해진 애들의 식욕을 절제시키는 싸움에 매까지 들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 자살해 죽을 생각도 몇 번씩이나 했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달팠다.
허지만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탈북자 이 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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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December 4, 2013

Filled Under: Article, Colum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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