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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 때문에 (탈북수기) 3

아홉살인 둘째 아들을 얼울하게 저세상으로 보낸뒤, 주면사람들은 나를 보고 멍청해졌다는 말을 자주했다.
나도 자신이 전과 달리 삶에 대한 욕망이 깡그리 없어지는 것을 종종 느꼈다.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둘째아들을 때없이 생각하면서 슬픔과 함께 비관에 젖어 자살이라도 하고싶을만치 의욕을 잃군 했다.

그러나 나는 무맥하게 손맥을 풀고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나에게는 열두살인 큰아들과 일곱살인 막내딸이 달려 있었다. 억지로라도 살아야 했다.

수백 만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시절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나의 어린 자식들은 못먹어본것 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풀과 풀뿌리,술찌꺼기와 된장찌꺼기, 나무껍질과 두부찌꺼기를 비롯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먹었다. 짐승도 안먹는 것을 먹고 살았다. 옥수수가 생기면 약처럼 풀에 조금씩 섞어 끓여먹었다. 그때 절감한 것인데 아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시들어 가는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애처롭고 가슴이 아프다.

북한에 “흉년에 아이 배터져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의 뜻은 옛날부터 아무리 기근이 들어도 아이들만은 배부르게 먹여살렸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죽고 영양실조에 시들어 가도 나라의 지배계층들은 체제옹호만을 매일 외쳐대며 자기 배 채우기에만 급급해 돌아쳤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때 나라와 체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김정일의 정치는 철두철미 반인민적통치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어린 둘째 아들을 억울하게 땅에 묻은지 1년이 지나간 1997년 8월이었다. 그 날 나는 아침부터 분조소(파출소)에 불려갔다.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 직장에 몇 개월 나가지 않았는데(당시 직장에 나가 일해도 식량배급은 전혀 없었다)그것 때문에 나를 노동단련대(한국의 80년대 삼청교육대와 같은 곳)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은 하소연 한마디 못하고 죽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날 분주소(파출소)에 불려갔다가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열세살이 된 큰 아들애가 귀뺨에 퍼렇게 멍이들어 방안에 누워 있었다. 나는 누워있는 아들애를 일으켜 앉혀놓고 얼굴에 왜 퍼렇게 멍이 들었냐고 따져물었다. 아들애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먹이며 자기가 뒷집의 터밭에서 몰래 강냉이 두 이삭을 따기자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붙들려 매를 맞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래 뭘로 때렸냐?”
울컥 화가나는 나의 물음에 아들애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하나 때리고 다음에는 주먹으로 때렸어요”

그때 나는 속이 터지는 것 같은 원통함과 가슴이 미여지는 것같은 비애를 느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큰 아들애는 마음이 착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시들어가는 막내 동생에게 자기 밥(풀에 강냉이 가루를 조금 섞어 끓인것이었지만)을 더 주고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종일 방안에 누워 있군하던 애였다.나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아들애를 꽉 부둥켜안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다.세상이 정말 무섭게 변해간다는 것을 절감했다.
강냉이 두 이삭이 뭐길래.

뒷집 주인도 전에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이웃들과 나누어 먹군하던,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그러나 전대미문의 굶주림은 사람들을 잔인하고 악착같은 냉혈동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악착한 승냥이같은 기질을 가져야 살아남는 세월이 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면 자신이 굶어야 하는 비정한 세월속에 사람들은 인정따위를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유일한 재산이었던 낡은 자전거를 가지고 시장에 나가 강냉이 한 배낭을 바꾸어 왔다. 그것을 한번에 삶아 아들애와 딸애에게 주었는데 그 날 허기졌던 애들이 맛있게 강냉이를 먹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부터 한달이 지난 후 열세살이던 큰 아들애는 집을 나갔다.
내가 둘째아들애를 잃고 마음고생하는 것을 봐서인지 큰 아들애는 집을 떠날때 중국으로 간다고 편지한장을 써놓고 갔다. 아들애는 편지에 자기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동생에게 자기몫까지 밥을 배불리 먹일 수있을거라고 썼다.

*** *** ***

그후 나도 딸애를 데리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애를 찾지 못했다.
큰 아들애를 찾아 중국에서 10년동안 헤맸다. 그렇지만 넓은 중국땅에서 아들애를 찾는다는 것은 산속에서 바늘찾기였다. 아들애가 살아 있으면 지금 28살이다.

나는 지금도 푸짐한 밥상에 마주앉을 때면 때없이 목이 꽉 메는 것 같은 비애를 느낀다. 배고픔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둘째 아들애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간 큰 아들애를 생각하면 아직까지 살아있는 내가 파렴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식당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밥먹는 모습을 보면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있을 때가 종종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억울하게 죽은 둘째아들 생각에 혼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첫째 아들을 만나 그애가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나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끝-

탈북자 이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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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December 4, 2013

Filled Under: Article, Colum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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