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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민속무용예술단 무용수’ 김미연 탈북민의 대모로 우뚝 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유일세습 독재체제의 권력암투와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있는 이즈음, 살기 힘든 북한을 탈출해 이곳 캐나다에 온 탈북민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김씨 수령님 일가는 왜 인민을 그토록 학살하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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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한동포커뮤니티센터장은 북한에서도 평양 중심부의 상류층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화벌이 무역선 선장, 어머니는 기간산업 공장의 간부로 근무하는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북한에서는 외국에 왔다 갔다 하는 무역선 선장과 공군 조종사는 당으로부터 최고의 신뢰와 대우를 받는 계층에 속한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탈북을 감행할 수 있는 직업이기에 그녀의 부모는 그만큼 철저한 사상 검증을 거쳐 공산당의 절대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과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무용을 배웠다. 늘씬한 몸매와 미모를 가진 그녀는 중학교 3학년 때 무려 열 번에 걸친 엄중한 시험 과정을 거쳐 중앙5과의 최종선발 대상이 됐다. 중앙5과는 북한에서는 모든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곳이다. 중앙5과는 당 중앙위원회 5과를 줄인 말로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졸업할 시기에 전국의 각 학교에서 2~3명씩 실력과 몸매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 학생을 차출해 그들 중에서 10단계를 거치는 경쟁을 통과한 소수 정예의 학생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뽑힌 남학생들은 김일성김정일 부자 경호 또는 대남 연락소들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반면에 여학생들은 엄격한 처녀성 검사에서 합격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선발 조건이 적용된다. 이렇게 선발된 여학생들은 중앙당에서 종사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 기쁨조로 차출되는 여성들은 김일성 가문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중앙5과 최종 선발에서 뽑히지 않았다. 최종 선발대상자는 마지막으로 부모의 동의를 필요로 했는데, 상류층으로 아쉬울 것 없었던 부모는 딸을 중앙5과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녀는 유명한 평양민속무용예술단 무용수로 채용됐다. 이곳에서 그녀는 중앙당이 짝지어준 조총련계 출신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가극단의 가수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실력있고 잘생긴 남편을 그녀는 사랑했다. 그녀의 행복은 탄탄대로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어느날 찾아온 불행.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온다. 북한 정부에 아낌없이 자금지원을 해주던 일본의 시삼촌이 사업에 실패했다. 자금줄이 끊어지자 소원해진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고심하던 남편은 중고차 밀무역에 손을 댔다. 사업이 번창했으나 비호하던 당 지도부간 알력다툼으로 남편이 희생양이 되었다. 공산당은 잔인했다. 단물을 빨아먹을 때는 언제고, 보위부에서 남편을 자본주의 앞잡이로 몰아 함경남도 오로 수용소(22호 오로 교화소)로 보내버렸다. 남편이 하던 사업은 모두 몰수되었다. 2개월 뒤 남편은 사망했다. 고난의 행진이라는 힘든 시기를 지나던 북한에서 수용소에 갇힌사람들은 개돼지와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다. 통강냉이죽 한그릇으로 연명하며 하루종일 삼청교육대보다 힘든 기합을 받는데 천하장사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곳이다. 어느날 면회갔더니 남편이 죽었다는 통보만 받았다. 억울한 죽음을 항변할 엄두는 고사하고 남편의 시신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뇌물써서 요로에 알아보니 남편은 모진 고초 끝에 영양실조와 파라티푸스병에 걸려 죽었고 수용소 커다란 아궁이에 던져 태워버려졌다고 들었다.
 
슬퍼할 힘도 겨를도 없었다. 살아남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평양시 창광거리 고려호텔 주방공장 뒤 7층짜리 아파트 702호.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아파트다. 그동안의 공적을 생각해 아파트는 빼앗지 않은 것이다. 아파트를 고위층 간부에게 팔았다. 북한돈 50만원(미달러 2천5백불) 목돈을 손에 쥐었다. 이 돈으로 평양에서 달라를 샀다. 그리고 나진선봉지구에 가서 무역상들에게 북한돈을 받고 팔았다. 벌어들인 북한돈으로 화장품을 사서 평양에갖다 팔았다. 통행증은 고위층의 도움으로 쉽게 얻었다. 1년 동안 1만불이라는 거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골동품에 손대면 거금을 번다는 소문에 전재산 1만불을 주고 고위층으로부터 골동품을 사들였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였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밥을 굶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 눈앞에 닥쳤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남편도, 재산도, 부귀와 영예도 모두 다… 함경북도 청진에 계시는 부모님께 찾아가서 5천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충격받을까봐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돈으로 중국에 가서 장사를 할 요량으로 두만강 국경지대로 갔다.
 
탈북 과정은 험난한 행로다. 돈이 없는 사람은 무작정 강물에 뛰어들다 익사하거나 총에 맞아 죽기 일쑤다. 무사히 건너가도 브로커가 없으면 십중팔구 중국 공안에 잡히게 되어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5천원이 있었다. 그 돈은 생명을 담보하는 돈이었다. 국경수비대에게 뇌물을 2천원 건넸다. 삭풍이 살을 에는 3월 어느날 저녁 경비병 두명이 양쪽에서 나를 호위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중국쪽에는 미리 연락된 조선족 브로커가 기다렸다가 안전한 곳으로 숨겨주었다. 이제 두만강을 끼고 돌아가는 산길만 무사히 지나면 한숨 놓을 수 있다. 그런데 중간에 중국 공안이 지키는 검문소를 거쳐야 한다. 브로커가 준비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검문소 못미쳐 차에서 내렸다. 미리 알려준 대로 검문소를 우회해 산을 넘었다. 넘어갔더니 아까 탔던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탈북자의 피맺힌 한은 끝난 것이 아니다. 또다른 고난이 그녀 앞에 놓여있었다. 중국에서 일본의 시삼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시삼촌에게서 도움받을 생각으로 중국행을 감행했는데 오도가도 못하게 생겼다. 중국어가 안되는 탈북 여성은 모진 멸시와 위협에 이은 성적 학대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던 그녀는 착한 브로커의 도움으로 한국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오랜 기다림과 인내 끝에 이곳 토론토까지 올 수 있었다. 사선을 뚫고 나온 그녀가 이곳에서 매일 마주대하는 일상은 북한의 그것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북한에 남기고 온 아들과 부모 형제를 생각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탈북 동포의 절규가 묻어있다.
 
내 한몸 돌보며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탈북자들을 도울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답은 교회 설교시간이나 방송에서 외쳐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북한에서 최고위층 생활을 할 때는 인민의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내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동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이곳에 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탈북 동포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선을 넘어온 탈북민들이 이곳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언어 장벽과 취업 장벽, 그리고 동포사회의 따가운 시선”이라고 밝힌 그녀는, 한인사회 동포에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탈북민은 우리가 껴안고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이므로 따뜻한 시각으로 봐달라.”며 관점의 전환을 촉구했다. 비록 여러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땅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캐나다 사회에 꼭 필요한 씨앗을 키우는 마음으로 배려와 사랑을 함께 나누고 살자면서 밝게 웃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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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December 26, 2013

Filled Under: Global People, Head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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