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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어떻게 ‘시간제 일자리의 천국’이 됐나

사회협약 맺어 전일제 전환 보장하고 처우 격차도 없애아나 카우퍼(35)는 ‘아들 셋’을 둔 엄마다. 4살, 3살, 생후 5개월 된 장난꾸러기들이랑 씨름하다보면 숨 돌릴 틈도 없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끝나면 올여름엔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카우퍼는 직원 40명의 작은 건설회사 안내데스크에서 일했다. 8년 동안 근무했던 외국계 전자회사를 2011년 그만둔 뒤 ‘몬스터보드’라는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통해 급하게 찾은 일자리였다. 지난해 12월, 아이들이 모두 잠든 저녁 시간에 만난 카우퍼는 “주 3일 근무라 아이를 돌보면서 일할 수 있다는 점에 혹해 눈을 한껏 낮춰 간 직장이었다”고 말했다.

전체 노동자 38%가 주 30시간 미만 근무

카우퍼는 ‘시간제 노동자(파트타이머)의 천국’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외곽에 산다. 그는 워킹맘으로 살기 위해, 시간제 노동자가 되길 자청했다. 수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 3일만 하루 8시간씩 근무한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온전히 아이들과 보낸다. 카우퍼가 회사에 나가는 사흘 중 하루는 ‘아빠의 날’이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엄마·아빠가 모두 일하러 가는 날에는 아이들을 유치원 등 보육시설에 맡긴다. 네덜란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이다.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노동정책 고문으로 일하는 드리스 바스텔링크는 주 4일 근무한다. 남은 평일 하루는 세 아이를 위해 ‘아빠의 날’로 쓴다. “아이랑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 36시간 근무를 4일로 나눌지, 5일로 나눌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시간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이 없어져서 승진에 큰 지장이 없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아내도 주 4일만 일한다.

카우퍼처럼 주 30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는 네덜란드 전체 고용의 37.8%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65%가량은 정규직이다. 시간제라도 전일제(풀타이머)와 차별은 전혀 없다. 임금은 철저히 일한 시간에 따라 정해진다. 각종 복리후생이나 수당도 전일제와 똑같이 적용된다. 휴가도 1년에 25일을 쓸 수 있다. ‘시간제로 일한다’고 하면 저임금에 사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는 ‘나쁜 일자리’로 여겨지는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시간제에서 전일제, 전일제에서 시간제로의 전환이 자유롭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어느 쪽으로든 전환하겠다고 회사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2001년 시행된 ‘노동시간조정법’(WAA)과 단체협약이 이를 보장한다. 당장 전일제에 빈자리가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회사가 노동자의 요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시간제 일자리를 활성화하겠다고는 했지만, 시간제에서 전일제로의 전환을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앙꼬 빠진 찐빵’인 셈이다.

한국보다 연간 90일 적게 근무

1980년대 초반, 네덜란드는 높은 실업률과 낮은 고용률 등 ‘네덜란드병’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이때 노·사·정이 모여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을 맺었다. 이후 법정 노동시간을 주 36시간으로 줄이고, 시간제 노동자 보호 수준을 높이기로 했다. 1993년엔 노·사·정 협약을 통해, 시간제와 전일제 사이 동일 임금과 동등한 수당 지급을 강제했다. 시간제 일자리를 ‘양질’로 만들 제도적인 기틀을 닦은 것이다.

마침 여성들의 ‘요구’도 맞아떨어졌다. 네덜란드는 모성보호 요구가 한국만큼이나 강한 나라다. 여전히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사고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키아 타이든스 암스테르담대학 노동연구소(AIAS) 교수는 “1980~90년대엔 여성들 스스로도 일과 가사를 양립하면서 노동시장에 남고 싶어, 시간제 일자리를 요구하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은행 등 금융권이 앞장섰고, 교육·건강 서비스 등 공공부문이 뒤따랐다.

정부는 여성 고용을 확대하기 위한 보육 정책을 내놓으며 장단을 맞췄다. 1990년 공공 보육시설을 늘리고 보육보조금을 증액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0~4살 아동을 위한 보육시설 수는 1989년 1만7천 개에서 1995년 5만9천 개까지 3배 이상 늘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4년 52.6%에 불과하던 여성 고용률은 5년 뒤엔 61.1%로 높아졌다. 전체 고용률도 63.9%에서 70.8%까지 상승했다. ‘고용률 70%’를 외치는 박근혜 정부가 따라하고 싶어 할 만한 모범답안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한국은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네덜란드는 전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다. 연간 노동시간이 1379시간(201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으로 한국(2116시간)보다 700시간 이상 짧다. 한 사람당 1년에 90일 가까이 한국보다 적게 일하는 셈이다. 한국처럼 장시간 노동 시스템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시간제 일자리만 늘리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네덜란드의 여성 고용률은 79%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의 천국’이기도 할까? 시간제 일자리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65%나 된다. 반면 전일제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고 고위직 여성도 많지 않다. 사실상 ‘시간제 일자리=여성 일자리’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계와 노동조합 등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카텔레너 파스키에 네덜란드노총(FNV) 부위원장은 “남성은 전일제, 여성은 시간제라는 성별 분업이 단단하게 뿌리내린데다, 여성들이 계속해서 가사나 양육 책임을 떠안으며 경력을 쌓는 데도 한계가 많다”고 지적했다.

‘남성=전일제, 여성=시간제’ 고착은 한계

보육 인프라도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보육시설은 부족하고 보육비는 비싸다. 네덜란드는 소득에 비례해 보육료가 책정되는데, 세금 환급 방식으로 이 중 일부를 돌려준다. 카우퍼는 아이 보육비로 월 1300유로가 들어간다고 했다. 월급이 1500유로 남짓이니, 일을 해도 돈이 모래알처럼 다 빠져나가는 셈이다. 게다가 보육시설은 저녁 6시까지만 운영된다. ‘칼퇴근’ 해서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30분 단위로 벌금을 물어야 한다. 카우퍼는 “보육비가 부담스러워 전업주부로 눌러앉는 여성이 많다. 하지만 애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면 모두 전일제로 일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카우퍼도 몇 년 뒤엔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믿을 만한 육아도우미를 고용할 계획이다.

주 12시간 미만의 단시간 일자리가 모두 ‘양질’이 아니라는 점도 네덜란드 시간제 일자리의 한계다. 전체 노동시장의 4~5%를 차지하는 ‘호출형 근로계약’(Zero Hour Contracts)은 대표적인 불안정노동이다. 미리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사용자가 ‘호출’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야 하는 일자리로, 가사도우미·베이비시터·노인돌보미 등에 많다.

키아 타이든스 교수는 “한국에서 시간제 일자리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려면, 시간제가 ‘질 낮은’ 일자리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전일제 또는 정규직과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여러 규정의 마련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특히 네덜란드처럼 노·사·정 간 사회적인 대화와 협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문 기사 : 한겨레21 황예랑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36&aid=00000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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