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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잎사귀(탈북수기) [8]

8. 심양시에서

 

내가 흑룡강성의 오상시에서 선화 할머니의 딸을 따라 심양시로 갔을 때는 2003년 3월이었다. 선화 할머니의 딸은 심양시에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서탑가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이모라고 불렀다. 그는 몇 년전에 남편과 이혼 하고 초중에 다니는 아들애를 데리고 혼자살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일곱살이었다. 그는 선화 할머니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선화 할머니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서인지 항상 나에게 친절하려고 애썼다. 그는 심양시 서탑가에 자그마한 식당을 차려놓고 있었다. 나는 그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시작했다. 식당이라는 것이 자그마한 식탁이 여덟개밖에 안되는, 간이음식점 같은 것이었다. 식당에 작은 안방이 하나 달려 있어서 잠자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중국의 4대 도시중 하나인 심양시의 번화가들은 황홀했다. 밤에는 수많은 빌딩들에서 네온 불빛이 번쩍이고 낮에는 사람들이 끝없이 붐비는 대도시의 광경은 나에게 별천지 같았다. 당시 열아홉살의 청춘이었던 내가 번화한 도시의 숨결, 쌍쌍이 걷는 수많은 청춘남녀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가슴 설레이는 어떤 의욕같은 것을 가져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 별천지 같은 대도시의 숨결을 느끼며 어떤 미련같은 것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이 북한에서 온 나 같은 어린 여자에게는 헛되고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심양에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난 어느날, 서탑가의 한 아파트에서는 가스폭발 사고가 났는데, 그 사건이후 중국경찰들은 혈안이 되어 북한여자들을 잡아들였다. 이유는 가스폭발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북한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나이가 스물 다섯살인 처녀였는데, 50대 한국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심양시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그 처녀가 어떻게 심양까지 오게됐고 무슨 이유로 50대 한국인과 동거하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1년 전부터 동거했는데 처녀가 참 예쁘게 생겼다고 했다.

 

그 북한처녀가 어느날 죽으려고 가스통의 밸브를 열어놓은채 방안에 쓰러져 있었고, 50대 한국인은 집에 들어왔다가 가스냄새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조용히 집을 빠져 나와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 방문을 열자 포화상태에 있던 가스와 가스통이 폭발했고, 그 사고로 북한처녀와 중국경찰이 한 명 죽었다. 폭발이 얼마나 강했는지 윗층의 콘트리트 층막까지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사고가 난 후 50대 한국인은 잠적했다.

 

그 사건은 한동안 서탑가의 사람들 속에 이슈가 되었었다. 사람들은 죽은 북한처녀가 불쌍하다는 말을 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스물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느냐고 동정했다. 사람들은 죽은 북한처녀도 인신매매를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여론에 관계없이 중국 공안은 사고원인이 북한에서 온 여자때문이라는 듯, 매일같이 북한여자들을 잡으러 돌아쳤다.

 

어느 날, 내가 일하는 식당에도 두명의 경찰이 왔다. 다행히 그들은 춘방이모 (선화 할머니의 둘째 딸 이름은 춘방이었다)가 잘 알고 있는 조선족 경찰이었다. 그들은 춘방이모에게서 나에 대한 설명, 내가 비참하게 팔려다니다가 심양까지 오게된 사연을 듣고는 측은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동정은 가지만 어쩔 수 없어요. 상부의 지시가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그냥 가겠어요. 대신 내일까지 저 여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요”

 

경찰들이 돌아간 후 춘방언니는 속상한 듯 안방에서 온자 맥주를 마셨다. 나는 춘방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모, 난 그럼 다른 곳으로 가겠어요” 춘방이모는 미안한 눈길로 나를 봤다. “갈 곳은 있니?”나는 아무대답도 못했다. 갈곳은 없었다. 갈곳이 없지만 가야 하는 것도 분명했다. 춘방이모는 떠나는 나에게 중국돈 3백원(당시환율로 38달러)을 주었다. 그동안 식당에서 일한 돈이었다.

 

춘방이모는 떠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여기 서탑가는 도시 중심이 돼서 단속이 심해. 차라리 심양시 변두리에 가면 단속은 덜할거야” 나는 춘방이모에게 인사하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로 나왔지만 갈곳이 없었다. 암담함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턱대고 도시길을 따라 걸었다. 나는 그때 갈곳이 없어 객지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보았다.

 

나는 그날, 어느 아파트 아래의 아이들 놀이터에 쭈그리고 앉아 밤을 보냈다. 다음 날도 나는 그냥 도시를 방황했다. 그러다가 한글간판을 붙인 작은 음식점에 들어가 만두를 하나 사먹고 나오는데 음식점 주인이 나를 불러세웠다. 음식점 주인은  나이많은 조선족 여인이었다. 그는 나를 불러세우고 아래위를 흩어보며 북한에서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짧게 대답하고 나오려는 나에게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일자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요?” “예”나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내가 북한에서 온 여자라는 것, 또 거처할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넘겨짚은 것 같았다. 그는 순순히 응대하는 나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 “내가 한국 사장님을 한 분 소개해 줄게. 그 사장님은 좋은 사람이야. 돈도 많고” 나에게 횡설 수설하던 그 여인은 급히 어데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생각해본 나는 여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에게 급한 것은 거처할 곳과 일자리였다.

 

한국인 사장은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차를 타고 나타났다. 나는 그날 처음 한국사람을 보았다. 음식점의 여주인은 그를 보고 최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사장은 운동선수처럼 몸집이 다부진 40대의 남자였다. 그는 나의 몸 아래위를 몇 번 흩어보더니 대뜸 언제 북한에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1년전에 왔는데 흑룡강성에 팔려갔다가 도망쳐 왔다고 솔직히 말했다. 한국인 사장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나를 데리고 음식점을 나왔다. 나오면서 음식점의 여주인에게 중국돈 백원을 쥐여주었다.

 

한국인 사장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도시의 한 아파트 단지였다. 후에 알았지만 그곳은 심양시의 외곽인 소가툰 이었다. 그곳도 서탑가처럼 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한국인 사장을 따라 아파트로(숙사) 들어갔던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북한여자들이 세명씩이나 있었다. 모두 20대 안팎의 처녀들이었다. 한국인 사장은 침실에서 자는 세명의 북한 처녀들을 거실로 불러내고 환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친구가 또 한명 왔다”

 

나는 침실에서 나오는 북한처녀들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며칠을 굶은 것처럼 기진맥진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눈곱이 내배고 콧물이 흘렀다. 내가 그들이 마약 중독자들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한국인사장이 유흥업소인 노랫방을 경영한다는 것도 그날 저녁에야 알았다. 나는 이틀만에 그곳에서 다시 도망쳤다. 깡패같은 한국인 사장이 어린 북한여자들을 마약중독자로 만든 것을 보고, 마약에 취해 노랫방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북한처녀들을 보고는 그곳에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도망친 날도 나는 밖에서 밤을 보냈다. 어느 아파트 단지의 콘크리트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이 꽉 막히는 것같은 참담함에 혼자 눈물을 흘렸다.  나 같은 북한여자는 중국땅 어디에서도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비관과, 앞날에 대한 암울함에 젖어 흘린 눈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얼마전에 가스통을 터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북한 처녀처럼 나도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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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November 19, 2013

Filled Under: Article, Colum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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