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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인종차별에 맞선 수학자 로치의 삶

리 로치(Lee Lorch) 옹 98세로 타계
인종차별에 맞선 영원한 로빈훗
 
지난 2월 28일 평생 동안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해 온 수학자 리 로치 옹이 토론토 병원에서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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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강단에 설 수가 없었다. 수학자의 직업을 가졌지만 리 로치 옹은 끊임없이 1950년데 미국의 흑백분리주의와 인종차별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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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반유대주의를 보며 사회정의에 대한 의식을 키웠다. 그의 딸 앨리스 로치 바텔(Alice Lorch Bartels)은 “아버지는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인종차별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알고 계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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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로치는 유대인 학생에 대해 엄격한 입학 정원을 적용하던 시절에 코넬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남태평양에서 지도제작사로 군복무를 했다. 그 당시 그는 흑인 병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목격했다. 그는 생전에 “항해 중 배의 청소나 궂은 일은 모두 흑인 병사의 몫이었다”고 회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리 로치는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투쟁은 흑인은 맨하탄 지역에 살 수 없도록 하는 “노 니그로(No Negroes) 정책에 대한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노 니그로 정책에 반대하는 청원을 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투쟁했다. 덕분에 그는 뉴욕칼리지에서의 일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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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주립대학에 일자리를 얻었을 때 그는 흑인가정을 그의 아파트에 함께 살 수 있도록 초청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을 주민들이 좌시하지 않았다. 엄청난 반대와 압력이 들어왔고 그는 대학에서의 일자리마저 잃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인종차별적인 주택정책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효과를 보았다.
 
일자리를 잃은 그는 아내와 딸과 함께 테네시주 내슈빌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흑인대학교의 일자리를 얻었다. 1954년에 미국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 정책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로치는 교육현장에서의 흑백분리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그의 10살 난 딸을 흑인 공립학교에 보냈다.
 
미국 의회와 주민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갖은 협박과 괴롭힘에 시달리고 때로는 주차장에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는 일을 겪는 등 그의 가족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
 
로치 가족은 1959년에 캐나다로 이주해 앨버타 대학에서 근무한 후 1968년에는 욕대학에서 일을 했다. 1961년 당시 에드먼턴에서 로치의 제자 중 하나였으며 나중에 욕대학 동료이기도 한 마틴 멀둔(Martin Muldoon)은 로치가 1960년대에 핵무기에 대항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멀둔은 “로치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 또는 독불장군으로 여겨졌지만, 언제나 변합없이 사회정의를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로치는 1985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후에도 수학자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쉬지 않았다. 던 배즐리(Dawn Bazely) 욕대학 생물학 교수는 “로치는 1990년대의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동료 교수들의 사회참여를 부추긴 사람이다”며 로치의 생전 활동을 회상했다.
 
로치에게 명예는 불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로치는 1974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을 따라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유가족으로는 딸과 두명의 손녀딸, 그리고 여동생 쥬디스 브룩스(Judith Brook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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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March 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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